이사를 마음 먹은 날부터 최대한 뭘 사지 않으려고 했지만 필요한 게 항상 있는지라 그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사 2주 전 쯤부터 이미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는데 특히 계절이 바뀌는 시점이었기에 겨울 옷은 다 빨아서 미리 싸놓았고 음식은 더 이상 사지 않았다.
이삿짐이 많으면 (예: 4인 가족 짐에 가구까지)이사 업체를 불러서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닌 경우는 교민 카페에서 이사 도와줄 분을 구하거나 운전할 줄 알고 면허증 있으면 밴, 트럭, U-Haul 등 본인의 필요한 크기에 따라 차량 렌트해서 직접 이사 하면 된다. 나는 가구가 없었기 때문에 교민 카페에서 짐 옮겨주실 분을 구했다. 날짜와 짐의 양을 얘기하고 몇 분 물어 보면 견적들을 주신다. 같은 거리를 우버 타고 가는 것 보다 살짝 비싼(10~20%) 가격에 시세가 형성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짐까지 가득 싣는데 그 정도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평소 같았으면 짐 넣을 상자를 슈퍼든 어디서 구해봤겠지만 코로나 시국이라 온타리오는 가게들도 다 닫고 원칙적으로는 필수 사유 외에는 외출 불가 봉쇄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자를 사기로 했다. 그 전에 온라인 쇼핑 하면서 좀 큰 택배 상자를 두 개 보관하고 있어서 이것들도 쓰기는 했는데 당연히 턱없이 모자랐다.
구글에 moving box 로 검색하니 바로 떴다. 이런 상자 파는 곳은 대표적으로 유헐 (U-Haul) 이랑 하드웨어 스토어인 홈디포 (Home Depot) 와 캐내디언 타이어(Canadian Tire). 유헐은 사업 자체가 이사 사업인 거 같다. 이사 관련 용품은 여기에서 거의 다 파는 듯. 근데 한 가지 안 파는 게 있다면 노끈. 캐나다에서는 노끈을 구할 수가 없다. 참나... 한국에선 그 흔한 노끈을 여기는 왜 안 쓰는 건가 대체? 응? 실을 꼬아 만든 것 같은 그런 끈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처럼 묶어서 들 수 있는 그 짱짱한 끈, 그게 없다. 이게 뭐 묶는 데 얼마나 유용한데 이걸 안 파냐고..................에혀.... 역시 캐나다. 절레절레.
이런 상자의 품질이나 가격 차이는 거의 없는 거 같고 나는 차가 없기 때문에 그 중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사러 가야겠다 생각해서 선택하다 보니 그냥 홈디포에서 샀다. 봉쇄 기간엔 생활 필수품 아니면 직접 가게에서 물건 사는 건 안 되고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면 가게 측에서 물건을 준비해놓았다는 이메일을 보낸다. 그럼 가게 앞으로 찾으러 가는 (curb-side pickup) 그런 시스템으로 운영 되었다.
상자를 배송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상자 네 개 가격 보다 배송 가격이 더 비쌈. 캐나다는 원래 그렇다. 암튼 그래서 나도 상자를 라지 사이즈 하나, 미디엄 세 개를 주문하고 다음날 찾으러 오라는 이메일을 받고는 찾으러 갔다. 잠깐 여기서 이사 상자 크기 문제. 이게 상자들이 일반이 있고 두꺼운 거 (Heavy Duty) 가 있는데, 내가 해보니까 두꺼운 것도 한 두 개 사는 게 좋을 거 같다. 상자가 미디엄 사이즈만 돼도 물건 차곡차곡 담으니 이게 무거워서 상자가 그 무게를 감당을 잘 못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박스 뜯고 다시 싸야 했음. 그릇이나 책 같은 거 담을 생각이면 두꺼운 걸로 해야 한다.
홈디포 정문 앞에 도착해서 내 물건이 준비 되었다는 이메일의 "I'm here" 버튼을 클릭하니 양식이 있는 화면이 열렸다. 근데 parking spot 번호를 쓰란다. 잉... 난 걸어왔는데, 어쩌지? 생각하다가 Front gate 입력해봤는데 숫자밖에 허용이 안 돼서 그냥 000을 입력하고 문 앞에서 물건 옮기던 직원 하나한테 가서 얘기를 해보니 "아 그래? 그럼 여기서 기다리면 누군가 니 물건 가지고 나올 거야." 라고 한다. 하지만 매장 측에서 전화가 왔다. 난 걸어왔다, 지금 정문 앞이다 설명하니 알았다고, 좀 기다리면 직원이 물건 가지고 나올 거라고 한다.
5분쯤 기다리니 앳된 남직원 하나가 내 상자들을 카트에 실어가지고 나왔는데 으잉? 이걸 어떻게 들고 가란 거지... 싶어서 내가 이거 묶을 끈 같은 거 없냐, 나 걸어가서 버스 타야 한다 했더니 그 직원이 안에 들어가서 찾아 보겠다고 한다. 5분 쯤 후에 다시 나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미안하지만 구매하지 않은 어떤 물건도 그냥 줄 수 없다고 함. -_- 그래서 내가, 아 그럼 구매하겠다. 패킹 테입 사면 되겠냐 물으니까 가게에서 대면 구매 안 된다고 함. -_- 어쩌라고...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잖아! 그래서 아니 뭐 방법이 없냐 그랬더니 암 쏘리 끝. 캐나다가 이렇다. 서비스 정신 제로. 그... 상자 4개를 조각 조각 갖고 나온 것도 어이 없지만 그거 좀 묶어달라니까 그게 안 된다는 ㅋㅋㅋㅋ 그런 사람들이 캐나다 사람들이고 그게 캐나다의 일 처리 방식이다. 한국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기대하면 여기서는 복장 터져서 못 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상자 네 개를 겨드랑이에 끼고 천천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와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용 후기 설문 조사에 내용을 남겼다. 그거 테이프로 좀 붙여 주는 거 10센트나 하냐고. 니네 웨어하우스 안에 테잎 하나 없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해서 이사 가기 전날까지 캐리어 두 개와 박스 두 개 정도를 짐을 미리 싸놓았는데, 그랬는데도 이사 나가기 전날 일 하고 저녁 내내 짐 싸고도 새벽 1시나 되어서 일을 끝낼 수 있었다. 특히 그 방에 새로 이사 들어올 사람을 위해 다 청소를 하고 나갔어야 해서 방, 화장실, 부엌의 내 찬장, 냉장고까지 청소해야 했고, 짐을 빼야 청소를 할 수 있는 거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워낙 미니멀리스트라 원래 짐 자체가 별로 없고 매일 쓰던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더 이상 짐을 미리 싸놓을 수도 없어서 그랬다.
이미 그동안 정말 많이 버리고 친하게 잘 지냈던 룸메이트에게 이것저것 주었지만서도 짐을 싸다 보니 결국 상자도 모자라고 귀찮아서 음식도 많이 버렸고, 멀쩡하게 내가 쓰면 될 키친타올 3롤도 그 친구에게 줘버렸다.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하는 말이 이사 많이 다니면 살림살이 거덜난다고...
짐을 싸기 시작하니 아까 얘기했던 상자의 감당 무게가 큰 문제가 되었다. 그냥 막 쌀 수도 없었던 게 상자가 모자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정말 완벽한 테트리스를 구현해야 했고, 어느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면 상자가 감당 못하고 터질 수 있어서 무게도 적정하게 분배해야 했다. 실제로 상자 하나를 한 번 들어봤다가 손잡이 부분 찢어져서 결국 테잎 다 뜯고 무거운 걸 꺼내 여기저기로 나눠서 다시 쌌다. 그릇 같은 부엌 살림은 하나하나 다 뽁뽁이로 싸야 해서 몇 개 없지만서도 오래 걸렸고.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진도가 느렸고 12시 넘어서 짐 다 싸고 1시까지 화장실 청소. 아침부터 이불이랑 침대 시트들까지 빨아댄 거 생각하면 정말 하루 종일 소처럼 일했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허리가 완전히 안 펴질 정도였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라 다음 날 바로 이사를 간 집에서도 또 이것들을 풀어야 했다는 게... 하하하하. ㅜㅜ 이사는 정말 힘들다.
아침 8시에 오기로 한 이사 도와주시는 분이 조금 일찍 도착하셨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뭐 놓친 게 없는지 한 번 더 돌아 보고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짐 싣는 건 아저씨가 다 해주셔서 나는 짐을 모아놨던 거실에서 현관까지만 옮기면 되었다. 아저씨한테 칭찬 받았다. 이 일 하면서 이렇게 짐 잘 싼 사람 처음 봤다고. 네... 제가 좀 그래요. ㅎㅎ 짐 엉망으로 싸놓으면 차에 실을 때 공간 활용이 제대로 안 될 수 있고, 상자가 터질 수도 있고, 물건이 깨질 수도 있고, 결국 서로에게 다 불편하고 시간 오래 걸리지 않은가. 싸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싣는 건 순식간에 금방 다 실을 수 있었다.
4년이나 살았던 집을 떠나는 게 혹시 슬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전혀 아니올시다. 워낙 오래 살았던 집이라 지금도 머릿 속으로 그 구조와 가구들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을 정도지만 내게는 겨울에는 추워서 춥고, 여름에는 에어컨 때문에 추웠던 그 지긋지긋했던 추위, 징글징글했던 몇 몇 최악의 룸메이트들의 악몽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공간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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