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1 - 드라마 구성

별을 보고 걷는 사람 2022. 2. 13. 01:21

지난 설 연휴동안 <옷소매 붉은 끝동>을 정주행 했다. (그리고 재주행 함)

 

나는 원래 드라마를 별로 보는 편이 아니다. 태어나서 본 드라마의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 

영화는 그래도 많이 보는 편인데, 드라마는 일단 길고, 시간 맞추기도 힘들고,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에 몰입되거나 등장인물에 공감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문 편이기 때문. 그만큼 긴장감 있고 좋은 극본이 드물기도 하지만 그동안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가 내 비위에 안 맞았던 것이 사실 가장 큰 이유다.

 

까놓고 말해서 여성혐오적 요소 때문에 그동안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다.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불쾌하고 공감 가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많이 본다고 하는 드라마에서 조차 대체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뭐고 하는 일이 뭐냐는 말이다. 대체로 사랑밖에 난 몰라 식이고 멍청함. 연애를 시작하면 더 멍청해짐. 남주의 도움 없이는 할 줄 아는 게 없음. 실수 투성이에 어딘가 모자라고, 해야 할 말도 똑바로 못 하고 울기만 하다 남주의 위로를 받음. 여자들이 결혼만 하면 갑자기 남편한테 존댓말 쓰고 부엌데기로 전락함. 대체 이런 인물들에 어떻게 공감을 느끼고 재밌게 보라는 건지 모르겠다. 똑부러지는 것 같이 보여도 처음에 남주한테 튕길 때 말만 좀 그렇게 할 뿐, 결국엔 연애와 결혼 말곤 하는 게 없는 역할이 여주 역할이고, 그 여주를 방해하는 못된 여자들이 여자 조연들 역할이다. 남성 캐릭터들은 또 어떠한가? 내가 세상 극혐하는 게 그놈의 '츤데레'다. 츤데레라고 해서 보면 전부 언어폭력에 가스라이팅이다. 신체 폭력까지 안 가하면 다행. 내가 보기엔 그냥 무례한 인격파탄자인데, 좋댄다. 물론 모든 드라마가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대체로. 

 

결론부터 말하면 <옷소매...>는 명작이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드덕'은 전혀 아니다. 다만 독서는 많이 하는 편이고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스스로 '극' 이라는 것에 아주 문외한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이야기든 그렇지만 특히 드라마가 재밌으려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하나 하나 다 살아 있어야 하고 주연과 조연의 이야기들이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단 한 장면도, 대사도 의미 없이 나온 장면이 없어야 함. 수 많은 드라마에서 조연들 중에 "쟤 나오면 재미 없어." 소리가 나오는데, 배우들한텐 억울할 일이다. 그 역할에 의미가 있고 그 인물에 공감할 수 있어야 배우도 연기를 재밌게 하지. 개인적으로 이걸 정말 잘 한 게 <해리포터>라고 생각한다. (영화 말고 책) 해리포터에 단 한 인물이라도 의미 없이 나온 인물이 있던가, 아님 단 한 장면이라도 의미 없는 장면이 있었던가? 나중에 보면 다 복선이고 다 뜻이 있었다.

 

<옷소매...>를 두 번 봐 보니 이 드라마가 그러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극본이 미쳤고, 연출 미쳤고, 배우들 연기 미쳤고 - 주연, 조연, 단역, 아역들까지 다 연기 너무 잘함. 가끔 댓글에 누가 어색하다, 못 한다 이런 글도 보이긴 하는데, 내 기준 저 정도면 극의 흐름 깰 정도도, 발연기 한 사람도 없었음. 카메라 워크도 미쳤고, 음악도 미쳤다. 전에 어떤 드라마들은 OST 팔이 때문인지 시도 때도 없이 음악을 틀어대는 통에 대사도 잘 안 들리고 극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이 드라마는 보면서 내가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극에 녹아들었음. 근데 또 음악들도 다 너무 좋음. 미술도 미쳤음. 거기 쓰인 한복이나 소품들 다 곱고 돈 많이 바른 티가 팍팍 났음.

 

극의 구성도 완성도가 매우 높다. 도입을 장화홍련전으로 시작한 것은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액자 구성' 이라고 하던가,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을 구현한 점이 인상 깊다. 이 드라마는 덕임이가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읽어주는 '전기수'(이야기꾼)로서의 역할로, 극을 통틀어서도 덕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꾼의 역할을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특히 영조에게 "세손을 용서해주시옵소서" 했다가 죽을 뻔 하자 자신의 100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드라마의 첫 대사도 덕임이가: "얘들아, 오늘은 여기까지." 로 시작해서 마지막 대사인 "그리하여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는 대사로 끝을 맺어 수미상관을 이뤘다. 감독님 인터뷰 보니 이산의 대사는 덕임이에게 하는 말이지만 덕임이의 대사는 나레이션처럼 했다 하는데, 그러니까 이산은 온전히 드라마 속의 인물이지만 성덕임은 시청자들의 전기수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드라마는, 성덕임이라는 전기수가 들려주는 이산과 성덕임의 사랑 이야기인 것이고, 이렇게 드라마로 기록됨으로써 그들의 '순간은 영원이 된 것'이다. 

 

기승전결 역시 너무나 잘 구현되어 있음은 말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거의 끝까지 둘의 사랑이 안 이루어지다가 막판에 휘몰아치고 슬프게 끝난 것에 불만인 시청자도 꽤 있던데 난 제작진의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뭔 둘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여줘. 소꿉놀이 보여주면 재미없음. 지금까지 수 많은 드라마가 남녀 주인공 둘이 연결되면서 김 팍 새서 그 다음부턴 늘어지고 시청률 떨어지고 재미 없다는 소리 들었음. 원래 극이란 게 그렇다. 불륜이 아니면 문학이 아니란 말이 있듯이, 이뤄질 수 없는 관계, 될 듯 안 될 듯한 관계, 쌓이는 오해, 그런 거 없이 둘은 행복하게 재미있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걸 누가 보냐는... 드라마는 긴장이 해소되면 끝이 나야 한다. 

 

연출, 음악, 미술 이 쪽은 내가 잘 몰라서 패스. 그냥 내 막눈에도 너무너무 훌륭했다는 것, 몇 몇 장면은 감탄사를 육성으로 뱉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고 싶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명장면은 따로 포스팅 할 거지만.

 

요새 세계적으로 한류가 인기다. 팬데믹 때문에 오히려 한국 문화의 가치가 더 널리 알려진 것 같아서 신기한데, 누군가의 말마따나 한국 대중 문화가 어느날 갑자기 팬데믹 때문에 등장한 게 아니다. 한국 대중 문화는 항상 거기 있었고 아시아권에서는 인기 끈지 20년이 넘었다. 개인적으로 나부터도 한국 대중 문화에 그리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영화나 드라마는 비위에 안 맞아서 많이 안 봤고, 음악은 원래 많이 안 듣는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정말 할리우드 영화, 미드가 재미 없게 느껴질 정도로 참신한 소재와 탄탄한 줄거리에 세련된 연출에 미친 연기력의 배우들이 나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많아진 것 같다. 한 10년 전쯤에는 한류 이대로 끝이다, 한국 드라마는 내용이 다 똑같다 소리 나왔었는데. K-pop도, 아이돌은 공장형 가수들이다, 음악이 다 똑같다, 등등 비판의 소리가 가득했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요새 보니 그마저도 지금은 다 극복해버린 모양새다. 너무나 재능 있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 지역은 진작부터고 남미까지도 상당히 대중적으로 퍼진 것 같은데 소위 선진국으로 불리는 유럽권과 북미엔 아직 대중적으로 파고들지 못 한 이유 중 하나로 나는 '여성혐오'를 꼽는다. 한국에 새롭고 좋은 소재에 재밌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지만, 위에서 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남녀관계에서나 여러가지로 여성 캐릭터들의 언행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걸 어떻게 서유럽 백인 여자들이 감정이입해서 보겠냐고. 여배우들이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인물이 하나의 이해받고 공감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정서적으로 맞아야 극을 보는 거지 않나. 물론 완전히 다른 문화권이라 생소해서가 가장 큰 이유이긴 할 것이다. 사고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고,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가 유럽인들에게 선진국이나 롤모델로서의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인 이유도 있고, 번역 문제도 크고.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장르는 배우 자체의 매력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아직은 소위 '구라파' 사람들에게 아시안들이 로맨스의 대상으로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도 큰 이유다. 그래도 액션, 스릴러, 범죄, 좀비, 이런 장르는 유럽과 북미에서도 꽤나 잘 팔리는 것으로 안다. 넷플릭스가 큰 역할을 하기도 했고, 이것저것 보다가 더 새로운 것 없나 찾는 영화 매니아들한테 한국 영화는 진작부터(2010년 이전) 인기 있었다. 하지만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뜻은 평범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뜻 아닌가. 

 

나는 <옷소매...> 보면서, '이 정도면 그 구라파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드라마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궁녀에게도 생각이 있고 의지가 있습니다." 했던 덕임이의 말처럼,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입체적인 여성 인물들이 있어야 자유의지를 가진 시청자들이 그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여성 인물의 존재는 다른 남성 인물의 존재까지 같이 빛날 수 있게 한다. 당연하지 않는가, 앤타고니스트가 멋있어야 프로타고니스트도 멋있는 거. 이 드라마는 주체적인 여자 주인공이 남자주인공까지 얼마나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가에 대해 가히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렇게 캐릭터 구현이 잘 돼 있고 수준 높은 작품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고, 또 14회까지 키스신 한 번 없는 드라마를 과연 서양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싶기도 한데, 일단 재밌는 건 만국 공통, 작품의 수준과 완성도를 느끼는 것도 만국 공통, 사랑이란 감정에는 국경이 없으니까. 기대되고 궁금하다.

 

<옷소매...>를 명작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극에 인생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극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보는 사람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대리 만족,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철학이 있어야만 좋은 극이란 건 아니다. 시간 때우기 용 가벼운 액션, 코미디나 공포나 판타지들도 다 존재의 의미가 있는 극들이지만, 그래도 명작이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결국 그 안에 녹여낸 등장인물들의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고, 시대정신을 발견하고, 동서고금 변치 않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지. 

 

끝으로 이렇게 좋은 작품 만들어 주신 제작진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