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드라마 보면서 인상 깊게 봤던 장면들이다.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거라 대사가 틀렸을 수 있음 주의.
1회 - 제조상궁이 덕임이에게
"제대로 보렴, 꿈을 품는 거야."
마치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은 대사였고, 가슴 속에서 무언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같은 느낌을 준 장면이었다. 죽음은 끝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아마 의도적으로 궁녀였던 영빈의 죽음을 가장 처음 일어나는 사건으로 배치하여 새로운 시대의 시작, 성덕임이라는 새로운 궁녀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듯 하다.
영조의 입을 통해서도 작가는 시청자들에게 미리 귓띔을 해주었다.
"혹시 아느냐? 너의 운명도 이 책 주인과 닮을지."
3회 - 세손 이산이 덕임이에게 정체가 드러난 연못 씬
이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
산이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당황하고 고개를 들어 덕임이와 서로를 바라보는 투 샷이 최고였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로맨스의 장면 보다 설렘을 준 장면이고 미장센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연출이 미쳤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되는 것 같다. 둘이 서고 등에서 여러 번 만났고 이미 아는 사이인데 이게 뭐라고 왜 설렌 건지 아직 이유를 정확하게 분석 못 하겠음. 그냥 정말 사람 가슴을 뻐렁치게 하는 예쁜 장면이었다.
5회 - 산과 덕임이 문을 사이에 두고 시경의 북풍을 같이 읽는 장면
이것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았을 장면인데, 나는 두 사람이 같이 나온 장면 중에서 이 장면을 가장 둘의 관계를 잘 표현했으면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으로 꼽고 싶다.
두 사람은 방문을 경계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보통 이러한 장애물은 연출에 있어서 둘 사이의 벽을 의미하곤 해서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서로 생각이 다른, 그런 관계를 나타내고 싶을 때 공간 분리를 통해 보여주는 걸로 쓰인다고 하는데, (영화 기생충에도 이런 기법이 많이 쓰였다고 함) 여기서도 이 문이 둘 사이의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장치로 쓰이기도 하고, 또 하나, 나는 둘 사이에 아직 "있었던" 마음의 벽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영조가 나타나 세손을 때리고 돌아간 다음 덕임이 그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 세손에게 충성을 맹세한 그 순간부터 둘 사이에 그 전까지는 아무래도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서로가 호감을 넘어서 신뢰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을 표현한 것 같다. 어쩌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왕세손으로서 누구도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없이 벽을 두르고 살았을 산이의 마음의 벽의 문을 그냥 열고 들어온 사람. 그 사람이 덕임이인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 전체적으로 보면 이 5회를 기점으로 극의 전개가 확 달아오르며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그런 연출적인 의미 말고도 그 한밤에, 정말 북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것 같은 그 밤에, 두 사람이 방문을 사이에 두고 시경을 번갈아가며 한 구절 씩 읽는 장면 자체가 아름답고 그 시의 내용 역시 너무도 두 사람에게 어울려서, 이 장면이 드라마 전체에서 내가 꼽는, 겨울철 화로 앞 은은하게 훈훈해져 오던 느낌처럼 가장 로맨틱 했던 장면이다.
"북풍은 차갑게 불고 눈은 펄펄 쏟아지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떠나리."
15회 - 홍덕로가 덕임에게
"그러니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걸랑, 기억하시오. 나를 죽인 것은 항아님이라오."
이 장면은 내가 '왜 일까?' 홍덕로는 왜 이 말을 덕임이에게 한 걸까, 하고 한참 생각했던 장면인데, 내 해석은 다른 포스팅에서 하려 한다. 제조상궁 조씨와 홍덕로, 이 드라마의 야망가였던 둘이야말로 주인공 둘 외에도 이 드라마의 양대 축을 이루는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 대로라면 정말 의미심장한 대사였고, 어쩌면 이 드라마의 철학과도 맞닿아있을지 모를 그런 대사여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16회 - 현재의 덕임의 과거의 덕임이와 인사하는 장면
친구들이 외출 나가는데, 이제는 후궁이 돼 궐 밖으로 나갈 수 없게된 덕임이가 마음만은 친구들을 따라가고 싶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을 보내주는 장면.
이것도 수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인데, 나는 처음 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두 번째 볼 때는 나도 모르게 따라 울고 말았다. 덕임이가 사랑을 선택하면서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 중 아마도 가장 소중했었을, 친구들과 외출의 자유를 생각하니 많이 공감이 돼서 눈물이 났음.
17회 - 대비가 혜경궁에게
"누가 우리를 이곳에 가두었을까요? ... 궁궐은 참으로 화려한 감옥이지요."
이 대사야말로 조선시대 궁의 여인들의 신세를 가장 잘 표현해준 말이 아닐까. 등장했던 모든 여성 인물들 - 심지어 악역이었던 화완옹주나 화빈 마저도 측은지심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던, 장희진 배우가 절제된 감성의 디테일 연기를 너무 잘해서, 담담하면서도 슬프게 들린, 그런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17회 - 정조가 제조상궁 경희에게
"의빈이 왜 널 기다린다는 것이냐. 내 빈이다. 내 사람이야!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내것이고, 절대 다른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아!"
정조의 애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서 같이 너무나 슬퍼졌던 장면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품 확인하는 장면에서 더 슬퍼한 것 같은데, 나는 이 장면이 개인적으로 정조가 얼마나 아파하는지가 실제로 심장에 느껴질 정도로 공감했던 장면이고, 다른 장면에서도 그렇지만 이 장면 때문에도 이준호 연기가 미쳤다 깨달았다. 자꾸 떠올라서 몇 번 돌려봤던 장면.
17회 - 산과 덕임이 저승에서 다시 만난 마지막 장면
아마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으로도 최고의 엔딩이라 손 꼽힐 수 있을 그런 장면이 아닐지.
"이것이 과거라 해도 좋다. 꿈이라 해도 좋아. 죽음이어도 상관 없어. 오직 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을 택할 것이다."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웹소설, 웹툰에 대한 단상 (0) | 2023.05.21 |
---|---|
탑건: 매버릭 관람 후기 (스포 없음) (0) | 2022.06.08 |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4 - 운명과 선택 (0) | 2022.02.13 |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3 - 이준호 (0) | 2022.02.13 |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1 - 드라마 구성 (0) | 2022.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