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옷소매 붉은 끝동 리뷰3 - 이준호

별을 보고 걷는 사람 2022. 2. 13. 06:00

사실 난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진 이준호라는 사람의 존재를 몰랐다. 

2PM도 이름만 들어봐서 알뿐, 오래 전 "10점 만점에 10점" 이 노래 불렀다는 거 외에는 멤버가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정도로 내가 한국 대중 문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외국에 살고 있기도 하고, 딴 포스팅에서 얘기했지만 한국 대중문화가 내 정서랑 안 맞는 부분들이 있어서 그동안 잘 안 본 것도 있고, 해서 사회면 기사에 뜨거나 진짜 국민적으로 인기가 많지 않으면 얼굴/이름을 잘 모름.

 

그래서 내가 숨겨진 보석을 미리 발견할 안목이 있다든가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나는, 성공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재능이 있고 노력을 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특히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사람들 특유의 내공과 향기가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닮고 싶지만 닮기 힘들어 동경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일단 철저한 자기관리부터 나는 글렀... ㅜㅜ 그래서 혹독한 자기 관리와 노력을 통해 결국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를 통해 이준호라는 사람을 알게되었고 사실 아직도 잘 모르지만 얼추 찾아본 바, 정말 박수 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따로 포스팅을 쓴다.

 

이 드라마에서 준호가 연기하는 거 보면서 예전에 김연아를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2006년에 헬스장에서 운동하다 티비에 김연아가 <종달새의 비상>으로 처음 주니어 대회에서 금메달을 탔다든가... 아무튼 그런 일로 저녁 뉴스에 나와 처음 연아를 봤는데, 그 때 경기하는 장면 보다가 운동하다 말고 '와...' 하고 넋을 놓았었다. 그 때 그냥 확신을 했었다. 피겨스케이팅은 1도 모르지만 이 사람은 운동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구나. '역사에 길이 남겠다.' 하고 당시 싸이월드에 끄적였더랬지.

 

세상에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너무나 많다. 같은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명배우, 명장면 그런거 너무너무 많고, 매력적인 배우들도 많고. 하지만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배우들은 드물고 - 이거는 또 보는 사람과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어야지만 가능한 거기도 한 듯. 실감나게 한다, 공감된다, 흡인력 있다, 그걸 사람들은 간단하게 연기 천재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표현은 좀 식상하잖아? 나는 이준호의 이산 연기를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게 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를 정말 그 시대 그 장소로 데려가 자기가 느끼는 걸 똑같이 느끼게 해주는 느낌. 4D 체험 연기라고 하면 될까나.

 

이런 걸 한 단어로 표현하면, "신들렸다." 한다.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예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 종종 이렇게 신들린 사람들이 나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음악가가 작곡을 하는 건 그 음악가가 하는 게 아니고 뮤즈 신이 영감을 내려준 걸 인간이 구현하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이 우주가 보내는 파장과 일치할 때,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같은 우주 안에서 연결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표현 보면 무슨 이상한 뉴에이지 종교나 미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있는데, 내가 이걸 말로 잘 묘사를 못 해서 그렇지 아마 예술하는 사람들은 이게 뭔 말인지 알것이다. 가끔 콘서트에서 완전히 몰입하면 같이 떼창하고 춤추는 관객도 신들리는 체험을 하게되는데 그것과 비슷하다. 장자의 물아일체, 트랜스 상태, 홀린다 등이 다 비슷한 표현임.

 

물론 작품이 좋아서 배우의 연기가 더 빛나는 건 말 할 필요도 없기는 하다. 이 드라마 보고 궁금해져서 <기방도령> 요약본을 유튜브에서 봤는데, 요약이라 그런지 아님 내용이 별로 재미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여기서 이준호가 딱히 연기를 아주 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괜찮네, 그 정도. 근데 그랬던 사람이 몇 년만에 이렇게 되려면 어떤 심경의 변화나 노력을 거친 걸까란 생각에 자못 궁금해지긴 한다. 토크쇼나 인터뷰에서 이산과 비슷해지려고 이것저것 - 자세라든가 젓가락질이라든가 다이어트라든가 - 외적인 걸 노력했단 얘길 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의 연기력이란 게 이렇게 단시간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천재는 타고난다고 하는 걸까?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좀 찾아 본 결과, 참 부단히도 열심히 산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같은 사람이 이름조차 모르고 관심 없이 지나갔던 그 긴 세월 동안에도 너는 참 치열하게도 살았구나... 하면서 살짝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세상의 수 많은 연예인들과 연예인 지망생들이 그렇지 않은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는지. 그래서 나같이 연예계에 별로 관심 없는 머글의 귀에까지 이름이 들려오고 얼굴이 인식될 때까지.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었던, 그의 팬이 오래 전 해줬다는 "인기는 계절이야" 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던, 하지만 자신만의 행복한 계절은 매 번 있어왔다는 말을 들으니, 아마 예전의 그런 좌절의 시간들이 역시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지금의 연기의 깊이를 만들은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그의 연기에 대해 얘기하자면 정말 그냥 미쳤다고 밖엔... 섬세한 감정 표현을 너무 잘하고, 목소리는 말해 뭐해. 목소리로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감. 대사 처리를 너무 잘 해서 자칫 오글거리거나 느끼할 수 있는 대사도 전혀 그렇지 않게 멋있게 하고, 그냥 세손일 때와 대리청정 할 때, 정조 집권 초기일 때와 중기, 말기일 때 말투나 목소리 높낮이가 다 다르고 신하들 대하는 태도도 달라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세손의 모습과 노련해진 왕의 모습까지 다 다르게 표현했음. 그리고 화를 내는 장면들에서 화의 대상과 내용에 따라 연기가 조금씩 다 다름. 덕임이에게 고백하고 차이기만 여러 번인데 이 때도 연기가 상황과 감정 따라 다 다름. 당연해야 할 부분일 수 있지만 연기자의 역량에 따라서 아닐 수 있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애정과 신뢰의 온도가 목소리로부터 다르게 느껴짐. 우는 장면이 여러 번인데 여기도 연기가 다 다름. 특히 양가감정을 느끼는 상황을 정말 잘 소화해내는데, 덕임이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 덕로를 신뢰하고 싶지만 그러기 힘든 심정, 특히 할아버지 영조와의 관계에서 이걸 너무 잘 보여줬다.

 

영조한테 혼났을 때, 영조가 죽었을 때, 은전군을 죽일 수 밖에 없었을 때, 덕로가 죽었을 때, 문효세자가 죽었을 때, 의빈이 죽었을 때, 의빈을 그리워 할 때 우는 연기가 다 미세하게 다른데, 우는 모습만 봐도 누구 때문에 무슨 일로 우는지 알고 같이 슬퍼질 정도여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우로서 중요한 거, 발음. 발음이 귀에 딱딱 꽂히면서 아주 정확하게 잘 들려서 너무 좋았다. 보통 한국 사람들끼리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이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플러스 주어 생략하고 얘기해서) 한국 사람들이 입을 잘 안 움직이고 발음을 대충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ㄷ/ㅌ", "ㅂ/ㅍ", "ㅐ/ㅔ" 등을 명확히 구분 안 짓고 발음을 해거나 "ㅖ"를 대충 "ㅔ"로 발음 하는 등의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준호가 발음하는 거 들어 보면 거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현현 수준. 세종대왕님이 들으시면 기뻐하실 것 같다. "옳지! 그게 내가 말한 그 발음이야!" 이러시면서.

 

이준호가 연기를 정말 잘한다고 느낀 장면들 너무 많아서 다 쓸 수가 없지만 그 중 하나가  화빈에게 "네가 감히!" 하고 화내던 장면인데, 유튜브 클립 중에서도 조회수가 거의 1위를 할 정도로 많이 나온 걸로 봐서 이 거에 반한 여인들이 많은 느낌이다. ㅎㅎ 내가 이 장면을 잘한 걸로 꼽는 이유가 뭐냐면,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화를 표출하는 장면은 자칫 잘못 하면 망삘 나기 십상이기 때문. 진짜 잘 못 하면 시청자들한테서 뭔 소리까지 나오냐면, "무섭다.", "실제 성격도 왠지 저럴 거 같다.", "그냥 본캐 아니냐." 이런 소리 나올 수 있다는 거다. 원래 배우가 자기 자신과 분리하여 캐릭터를 표현하기에 쉽지 않기도 하겠지만, 이런 종류의 연기가 어려운 연기고, 이준호 본인이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꽤나 고민하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준호가 연기한 장면 중에 내가 공감이 안 갔거나 아쉬웠던 장면을 꼽아 보라 하면 0. 진짜 하나도 못 꼽겠다. 없음. 아, 굳이 꼽자면 활 쏘는 장면이랄까? '활이 저렇게 흔들리는데 명중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ㅋㅋㅋ 근데 신궁이었다던 정조대왕의 활 쏘기 실력까지 기대하긴 무리니까 이해함.

 

내가 한국 영화를 잘 안 보는 이유 중에 하나가 또 특정 배우에 따라서 그 배우 특유의 쪼... 라고 하나, 그게 있어서 몰입이 잘 안 되기 때문도 있다. 뭘 봐도 그 배우로 보임. 특유의 말투, 특유의 표정, "시그니처" 라고 하는 인장처럼 박힌 게 있는데 그것 때문에 그 배우 팬들은 믿고 본다고 하기도 하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 가상의 인물이 어딘가에 실재 하는 것 아닐까 하고 느껴질 정도로 극에 몰입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내가 이준호를 이 드라마에서 처음 봤기 때문에 더 몰입이 잘 된 거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다음 작품을 보면 알 수 있겠지. 일단 다른 드라마나 영화 출연 장면들을 조금 본 바로는 이준호는 그게 없는 거 같아 앞으로가 기대된다. 내 장바구니에 넣어놓은 배우가 되었음. 

 

너무나 훌륭한 연기 보여준 이준호 씨에게 찬사와 더불어, 잠시나마 정조의 시대로 데려가서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